미국을 각성 시킨 마녀 재판 사건과 J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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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4, 2025
Moon

아서 밀러의 희곡 『시련(The Crucible)』은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마녀 재판 사건을 배경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이 사건은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에서 발생한 집단적인 종교 탄압으로, 1692년 5월부터 10월까지 25명이 ‘마녀술(Witchcraft)’이라는 죄목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상처를 주었지만, 동시에 매우 중요한 법적, 사회적 교훈을 남기며 미국 사법 시스템의 초석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위대한 작품 ‘시련’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살아있다는 것은 명예로운 이름을 지키는 것

남자 주인공인 존 프록터를 중심으로 한 서사는 다음과 같다.

17세 소녀 아비게일과 불륜 관계였었던 존 프록터. 아비게일은 존 프록터의 아내인 엘리자베스를 저주하여 죽이기 위해 청교도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주술까지 사용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마을은 마녀 찾기에 나서게 되고 아비게일은 마녀가 누구인지 지목하는 신성한 소녀로 인정받게 된다. 드디어 모든 공권력을 동원하고 공식적인 재판을 통해 엘리자베스를 마녀로 지목해서 죽이고 존 프록터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비게일의 주술이 이뤄지는 것이었을까?

아비게일과의 불륜관계로 늘 양심에 가책을 느끼던 존 프록터는 임신한 아내 엘리자베스를 지키기 위해 아비게일과의 불륜사실을 고백한다. 아비게일이 벌이는 모든 마녀 소동의 진짜 동기가 신앙심이 아니라, 자신과의 불륜 관계에서 비롯된 질투심과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복수심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존 프록터는 비록 살아남기 위해 자신도 마녀술을 행했다고 거짓으로 자백하기는 했으나 이내 마음 다 잡고 자백문을 찢어버리고 죽음을 선택하며 고백한다.

"Because it is my name! Because I cannot have another in my life!"
"이건 내 이름이니까! 내 인생에 다른 이름은 가질 수 없으니까!"

마녀는 정말 없었을까?

아서 밀러가 ‘시련’을 집필한 동기를 에세이에서 밝혔다. 그는 미국의 정치 탄압으로 불리는 매카시즘(McCarthyism) 광풍의 핵심 기관이었던 "비미국적 활동 조사위원회(HUAC)"에 소환되기도 하며 큰 고통을 겪었다. 세일럼의 무고한 사람들이 마녀로 지목되었듯 그 역시 공식적으로 공산주의자로 지목 당했던 것이다.

매카시즘은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하여, 명확한 근거 없이 개인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사회적으로 매장시킨 극단적인 반공주의 활동이다. 아서 밀러는 이런 매카시즘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기 위해 『시련(The Crucible)』을 집필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도 현실 세계에서도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은 당연히 마녀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기심, 탐욕, 시기심, 복수심에 가득차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지목한 사람들이 마녀이고 악마가 아니었을까? 아서 밀러도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마녀 재판은 왜 종교 탄압인가?

엄격한 청교도 규범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개인적인 신앙생활이나 태도를 '악마와 결탁한 증거'로 몰아 탄압하고 공동체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단으로 낙인찍어 제거했다. 존 프록터가 의심받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권위와 위선에 맹목적으로 순종하지 않았던 그의 독자적인 신앙 태도 때문이었다. 재판관들의 눈에는 이러한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태도 자체가 곧 악마에게 물든 증거로 보여졌다.

마녀사냥의 불길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그 시작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탐욕과 이기심이었다. 사람들은 해묵은 토지 분쟁이나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 상대를 '마녀'라는 이름으로 고발했고, 집단적 광기는 이기적인 복수심에 '정의'라는 거룩한 가면을 씌워주었다. 결국 광기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파괴하는 비극의 동력이 되었다.

왜 마녀 재판을 막지 못했는가?

정의를 실현해야 할 법은 왜 이 광기를 막지 못했을까? 당시의 사법 시스템은 '무죄 추정의 원칙'도, '증거 중심주의'도 없는 모순 덩어리였다. 재판관들은 유령을 봤다는 비논리적 증언을 증거로 삼았고, 종교 지도자들의 독선적인 신념이 법의 논리를 압도했다. 시스템 자체가 광기를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칼날을 쥐여준 셈인데, 과연 우리는 지금 그들보다 더 정의로운 시스템 속에 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광기의 재판이 정의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

세일럼의 끔찍한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가지 중요한 선물을 남겼다.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 법정은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대원칙을 세웠고, 종교적 신념이 법을 지배할 때의 위험성을 깨달으며 국가와 종교를 분리하는 초석을 다졌다. 가장 부조리했던 재판이 가장 합리적인 사법 시스템의 필요성을 증명한 셈이다.

300년 전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 증거'를 철석같이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편향된 세상만을 보면서도 그것이 객관적인 진실이라 확신한다. '마녀'의 이름과 형태는 바뀌었지만,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 상대를 단죄하는 '현대판 마녀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아서 밀러가 세일럼과 함께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이자, JMS라고 불리는 기독교복음선교회의 회원인 내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진실이라 믿고 있으며, 당신이 던지는 돌은 과연 정의로운가?"

작은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의 진실을 마주하기까지는 거대한 편견과 오해의 벽을 수도 없이 넘어가야 한다. 비록 그 벽들이 작은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사법 시스템의 딜레마: 성범죄 판결의 복잡성

"저는 대한민국의 사법 시스템을 믿습니다. 그래서 JMS에 대한 나의 시각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JMS에 대해서 부정적 인식을 가진 사람에게 내가 직접 들은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사법 시스템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정명석 선생님의 범죄 사실을 의심 없는 절대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나 역시 한국의 사법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법치주의를 지탱하는 사법 시스템의 근간을 우리가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 지 되묻고 싶을 뿐이다. 

검사도, 판사도, 변호사도 그 누구도 신이 아니다. 법의 전문가들 역시 이 사실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며, 특히 성범죄 사실 입증 과정에서 상당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범죄 사실이 있음에도 무죄 판결이 나올 수 있고, 반대로 범죄 사실이 없음에도 유죄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딜레마는 사법 시스템의 본질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회에서 마녀재판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성범죄 판결의 핵심 쟁점이 되었던 두 가지 주요 판례를 함께 살펴보자.

1. 대법원 2018. 10. 25. 선고 2018도7709 판결: '성인지 감수성'의 등장

대법원은 2018년 10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제시하며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인정했다. 이 판결은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내적 고통을 사법부가 이해하고 재판에 반영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실제 판시 내용: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나이, 성별, 사회적 지위와 경험, 그리고 가해자와의 관계 등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에 기초하여 피해자의 진술을 비합리적으로 배척하거나 진술의 신빙성 유무를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 판결의 취지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사건 발생 직후 신고하지 않거나, 가해자와 평소와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등 사회적 통념과 다른 행동을 보인다고 해서 진술의 신빙성을 쉽게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성범죄 피해자에게 불합리하게 높은 증명 책임을 부과하는 관행을 지양하고,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도록 사법 시스템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 판결의 핵심은 '피해자 진술이 항상 옳다'라는 무조건적인 유죄 추정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다움’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진술을 보다 공정하게 판단하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대중과 언론은 이 판결을 확대 해석하여, 마치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유죄가 확정될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러한 인식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흔들고 피의자의 방어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2. 대법원 2024. 1. 4. 선고 2023도13081 판결: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중심주의의 재확인

2024년 대법원 판결은 성인지 감수성 판결 이후의 팽배했던 오해를 바로잡고, 다시금 형사 재판의 기본 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중심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판결은 피해자 진술에만 의존해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며, 재판의 기본 원칙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실제 판시 내용: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는 것은 엄격하고 신중해야 한다. 피해자의 진술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증명력을 가져야 하며,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 판결은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무제한으로 인정하거나, 피해자 진술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유죄를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즉, 피해자 진술의 진실성은 여전히 여러 증거와 정황들을 종합하여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판결은 정명석 선생님과 같이 특정 방향으로 여론이 형성된 성범죄 사건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중의 분노와 언론의 확정적인 보도가 재판 과정에 개입할 경우, 법원이 오직 피해자 진술에만 의존하여 판결을 내릴 위험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2024년의 판결은 정확히 이런 경우에도 유죄의 확신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모든 증거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언론은 사법기관이 아니다.

JMS 사건은 이 두 가지 대법원 판례가 제시하는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피해자 진술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피해자다움'이라는 틀을 벗어난 공정한 판단이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진술에만 의존하여 여론 재판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지만,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중심주의라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둥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 원칙들은 피고인이 사회적 낙인과 언론의 뭇매 속에서도 최소한의 방어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정명석 선생님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무엇인가? 과연 결정적이었다고 할만한 것이 있는가? 언론은 사회 감시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때로는 편향된 이미지로 인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익히 보아온 현상이다.

과연 JMS와 정명석 선생님에 대한 미디어 속 정보와 여론은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대변하고 있을까? 한 교단의 교리, 언어,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편향된 시각으로 가득찬 언론이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판사가 되어 유죄를 확정하고 여론으로 단죄를 호소하는 것은 사법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이다. 이는 결국 법을 여론의 판단에 종속시키고, 모두에게 공정해야 할 사법의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현대화된 사법시스템이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법시스템의 판결이 한 사람의 선과 악 또는 죄의 경중을 완벽히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그 결정 안에는 무수히 많은 논쟁과 반론의 반론이 존재함을 명심하자. 정명석 선생님에 대한 판결이 증명할 수 있는 정명석 선생님과 기독교복음선교회에 대한 본질은 당신의 생각처럼 선명한 색이 아니다.

채널A의 법조 에세이를 통해 성범죄 사건을 대하는 한국 사법시스템의 치열한 고민을 느껴보자.  

[법조 시그널] 성범죄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 대법원의 두 판결